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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석원장의 책갈피(157) 세시봉

수리수리동술이 2011. 4. 2. 23:21

세시봉

 

 내가 알고 있던 가수란 직업은 자신만의 스타일로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 음악적 재능이 물론 중요하겠지만 자신만의 곡해석이 뛰어나고 그것을 목소리로 잘 표현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이 가수란 직업에 대한 저의 인식이 많이 변했습니다. 물론 저의 자의적인 노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대중매체가 만들어준 타의적인 변화라고 봐야겠지요. 화려한 퍼포먼스, 분장, 식스팩, S라인, 핫팬츠, 하의실종 등의 수식어가 거의 빠지지 않는 아이돌이 장악해버린 대중문화가 된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까요. 이러다 보니 잊혀진 '가수'를 많이들 알게모르게 그리워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런지 노래를 너무나 잘 하는, 노래만 정말 잘하는 사람에게 '감동'이라는 걸 받게 되었습니다.

 

 최근 정말 '가수'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사람들이 TV프로그램에 모습을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최신가요프로그램에서 아이돌에 밀려 인기를 얻지 못했던 '잘나가던' 가수들이 아이돌 못지 않은, 아니 아이돌 그룹보다 더 광범위한 연령대에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런 인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크게 '나는 가수다'와 '세시봉 스타들'입니다.

 

 

 

 

 '나는 가수다'란 프로그램은 서바이벌 형식으로 청중들이 노래를 듣고 그 자리에서 냉정하게 평가하는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진행상 오류가 있어서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20년차 가수를 떨게 만들 정도로 가볍지 않은 노래를 정말 잘해야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이렇다보니 정말 오랜만에 혼신을 다해 노래하는 가수를 보게 되었고 그 모습이 아이러니 하게도 '감동'으로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열심히 식스팩을 만들지 않아도 진정한 '가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시봉'은 7080세대의 전성기 시절 서울 종로 음악다방이었던 세시봉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프랑스어로 세시봉(C'est si bon)은 '아주 멋진', '아주 좋은'이란 뜻입니다. 당시 음악다방에서 활약했던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조영남, 이장희 등이 '세시봉 스타'들입니다. 이들이 최근 몇몇 프로그램에서 통키타 하나 둘러메고 부르는 옛 노래들이 주는 감동도 '나는 가수다'에서 느껴지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겁니다. 이들은 워낙 자연스럽게 노래를 해서 그런지 '혼신의 힘'을 다해 노래를 부른다기 보다는 정말 자신만의 음악적 재능으로 스타가 되었던 원래 노래를 정말 잘하는 사람들 같은 느낌입니다. 그들을 보면 '그래 저런게 가수야'라고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게 되지요.

 

 스위스 취리히대 이곤 프랭크와 스테판 노이쉬 교수는 흔히 셀렙(Celebrity)이라고 불리는 인기스타를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재능(Talent)을 통해 스타가 된 홀로서기형(Self made)스타와 미디어와 프로그램에 의해 제작된(Manufactured) 스타입니다. 음악다방을 통해 라이브 실력이 이미 검증된 '세시봉 스타'가 전자에 속하고 공개오디션,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만들어진 스타가 후자에 속합니다. 후자에 속한 가수라고 해서 실력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설픈 개인기로는 명함도 못내미는 스포츠나 클래식 등에 비해 대중음악은 다분히 만들어지는 스타가 많은 편입니다. 특히 아주 평범한 일반인에서 스타로 단기간 거듭나는 프로그램은 워낙 극적이어서 단기간 인기를 축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만들어진 스타는 말그대로 계속 '만들어주는' 것이 없으면 단명하게 됩니다. 하지만 홀로서기형 스타들은 굳이 토크쇼나 가십거리를 끊임없이 만들어내지 않아도 프로그램 한두편에서만 실력을 보여줘도 다시 부활하는 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단 가수뿐 아니라 다른 분야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기업에 있어서 마케팅과 홍보가 너무나 중요하긴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만들어진 제품이나 리더, CEO는 절대로 롱런할 수 없습니다. 마케팅과 홍보가 사라지면 팔리지 않고 밀려납니다. 품질과 재능, 능력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약한 맨살이 드러나자마자 퇴출되기 십상인 것입니다. 2001년 부도가 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선도적인 전기, 천연가스, 펄프 및 제지, 통신사업 회사 가운데 하나였던 엔론은 '포춘지'에서도 6년 연속 가장 혁신적인 기업이라고 이야기했었던 100년은 끄떡없을 것 같았던 거대 기업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적나라한 기업보고서로 유명한 '엔론 스캔들'의 내용에 의하면 초고속 성장의 엔론은  튼튼한 재무구조와 뛰어난 기술력이 아닌, 모럴해저드, 장부조작, 막강한 로비역, 정치권과의 유착으로 얼룩져 있는 사상누각이었습니다.

 

 진정한 제품과 리더는 잠시 잊혀질 순 있지만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본에 충실하고 정말 마케팅하고 홍보할 만한 것을 해야 오래 지속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최근 경영의 화두로 삼고 있는 '지속 가능한 경영'의 바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세시봉 스타'는 잠시 잊혀질 순 있어도 이렇듯 금세 부활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리고 우리가 재능을 펼칠 수 있는 '세시봉'은 어디입니까?